(20) 서울의 그라피티

김준기 | 미술평론가

반사회적인 사회예술, 그라피티

그라피티는 반사회적이다. 그것은 작업실과 전시장의 구별, 사유재산과 공공재산에 관한 법률, 전문가와 아마추어의 차별 등 예술의 생산과 매개, 향유를 둘러싼 온갖 제도와 관습 등의 사회적 합의를 어기면서 태어났다. 한국에 상륙한 그라피티 문화는 거리와 골목의 벽면을 타고 번지면서 무색무취의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소수 마니아들의 뒷골목 문화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중문화에 편입한 디제이와 비보이, 래퍼들과 달리 여전히 소수자 문화로 남아 있는 그라피티 아트는 힙합문화의 대중화라는 사회현상과 맞물리며 모종의 변화를 겪고 있다. 그라피티의 반사회적 성향은 오히려 서로 다른 문화자본을 가진 세대와 지역과 영역 사이의 소통을 시도하고, 그 벽을 넘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요인으로 작동해왔다. 슬럼가의 가난한 사람들이 사회적 불만을 토로하는 방식으로 쏟아내는 낙서들이 그라피티의 기원이다. 그라피티는 정확하게 이 낙서의 정신을 바탕으로 태어난 예술장르다. 그라피티는 벽화는 물론 카페와 클럽, 음반재킷이나 패션디자인 등의 분야에서 왕성하게 퍼지고 있다. 홍대앞과 신촌굴다리, 그리고 ‘압구리’에서 만나는 그라피티 아트는 문화의 종다양성을 풍부하게 만들면서 사회적인 예술로 진화하고 있다.

그라피티 아트의 성지로 자리 잡은 압구리(압구정 굴다리)의 그라피티.

그라피티 아트의 성지로 자리 잡은 압구리(압구정 굴다리)의 그라피티.

■ 압구리
서울 그라피티의 모태

압구정 굴다리를 줄여서 부르는 말, 압구리는 그라피티의 성지다. 그라피티 마니아들은 압구리를 그라피티의 명예의 전당(Hall of Fame)으로 여긴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한강시민공원으로 이어지는 토끼굴 같은 지하보도는 서울의 그라피티 아트를 낳은 모태와 같은 곳이다. 압구리의 역사는 15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대 말부터 이곳에서 활동한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은 주민들의 민원과 구청의 단속으로 쫓고 쫓기는 상황에서도 꾸준히 명맥을 이어왔다. 불법적 행위에 대한 단속으로 통제된 구역을 그라피티 명소로 만들어낸 것은 그림 그리는 게 좋아서 그곳에 모여든 이들의 열정과 더불어 금지와 허용 사이에서 유연성을 발휘한 주민과 구청의 태도가 한몫했다. 압구리는 부산의 똥다리와 더불어 한국의 그라피티 공간을 대표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이 두 곳은 의미 있는 문화공간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사뭇 다른 행보를 보였다. 부산의 똥다리가 그라피티 공간을 줄이고, 공간조성 공사를 하는 바람에 예전의 명성을 상실한 반면, 압구리는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만 그라피티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주민과 구청, 아티스트들 사이에 이 공간을 그라피티 공간으로 존치하자는 합의가 이뤄짐으로써 지속가능성을 담보했다. 10여년간 강남구청과 갈등·긴장 관계를 거친 지금의 암묵적 동의는 문화적 종다양성 차원에서 매우 값진 일이다. 메녹(menoc)이나 반달(vandal) 등과 같이 압구리를 지켜오며 문화를 만든 수많은 아티스트들의 열정과 주민, 구청의 문화적 포용은 문화도시 서울의 풍모를 재확인하게 한다.

홍대앞 주차장 거리 입구의 그라피티 벽화를 배경으로 에어컨 실외기에 빼곡하게 붙여진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의 스티커.

홍대앞 주차장 거리 입구의 그라피티 벽화를 배경으로 에어컨 실외기에 빼곡하게 붙여진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의 스티커.

■ 홍대앞
스트리트 아트로 진화

1990년대 중반 홍대앞은 카페와 클럽이 생겨나면서 특유의 거리문화가 발생하던 때다. 당시의 거리 분위기를 새롭게 만든 변동 요인은 거리 벽화였다. 홍익대 미술대학 학생들이 주최하는 ‘거리미술전’의 벽화 참여작가들은 거리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이어서 벽화의 수량, 수준을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한 일군의 아티스트들이 그라피티 라이터들이다.

이들은 여느 지역과 같이 집중된 구역을 형성하지 않고 홍대앞 골목 곳곳을 누비며 아기자기한 골목의 낙서화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사랑이나 속삭임 같이 따뜻한 귓속말을 전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담은 태깅(일종의 서명 낙서)에 골몰하기도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카페와 클럽에서 힙합문화 특유의 화려하고 원색적인 이미지를 선보이기도 했다.

홍대앞의 그라피티는 스트리트 아트로 넓어지고 있다. 압구리가 스프레이 캔으로 뿌리는 그라피티의 요람이라면, 홍대앞은 스티커와 포스터 작업 등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물론 거대한 벽면을 장식한 그라피티 벽화들도 많이 생겨났지만, 대체로 상업적인 의뢰작업이라 아티스트 특유의 이미지보다는 자본주의 시장구조에서 익숙하게 등장한 이미지들이 많다. 이렇듯 식상한 그림들 주변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아티스트들의 스티커들을 발견하는 것은 홍대앞 거리가 상업적인 그라피티에 점령당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건물과 골목 곳곳에서 만나는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의 그림과 스티커, 포스터 작업들은 홍대앞이 여전히 그라피티의 독특한 성지라는 것을 확인하게 해준다.

신촌 굴다리의 그라피티 벽화들.

신촌 굴다리의 그라피티 벽화들.

■ 신촌 굴다리
그라피티 순례지

국철 신촌역에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쪽으로 이어진 지하보도는 신촌굴다리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그라피티 벽화의 순례지로 떠올랐다. 일정한 높이와 너비 등을 유지하며 빼곡하게 들어찬 그라피티 벽화들은 이곳이 마니아들에 의해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공간이라는 걸 알아차리게 해준다. 처음에는 이곳도 단속이 심해 어려움을 겪다가 알음알음으로 모여든 아티스트들의 분투 덕분에 명소로 자리 잡았다.

만약 이곳을 공공미술 벽화로 처리했다면 한번 작업하고 나서 몇년간 손보지 않아 페인트칠이 벗겨지면서 흉물로 전락하는 수순을 밟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라피티 아티스트들 특유의 순발력과 지속성으로 인해 그 어느 곳의 공공미술 벽화작품들보다도 신선한 시각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공공미술 작품들이 대략 구상회화의 뻔한 논법으로 일관하고 있는 반면, 그라피티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문자추상 이미지의 차별화, 빠른 그림 그리기의 순발력 등의 장점을 살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의 자폐적 성향이나 공공영역에 관한 이해의 문제 등도 함께 검토될 문제다. 이들의 문화가 신선하지 않은 공공미술 벽화와 전향적으로 만난다면 도시의 벽화들에서 나타나는 진부한 표현들과 다양성 부재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공공적 장소에 공공의 재원으로 공공적 의제를 다룬다는 목표의 공공미술 가운데서, 특히 공공벽화 작업들이 살아있는 문화로 거듭나는 길을 그라피티 문화에서 찾는 지혜가 필요하다.

마커 펜으로 그려 벽에 부착한 GR1의 포스터 작업.

마커 펜으로 그려 벽에 부착한 GR1의 포스터 작업.

■ 그라피티와 도시의 문화생태

그라피티는 사회적 예술로서의 독특한 의미와 가치를 가진 장르다. 시민들의 생활문화와 동떨어진 예술의 어법들을 좀 더 동시대적이며 넓은 지평의 문화적 종다양성을 구가할 수 있게 하는 문명의 실험과 도전이다.

그라피티의 문자추상 이미지들은 얼핏 보아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는 대중적 시각문화라기보다는 힙합문화의 마니아들이 즐기는 소수자문화로 비친다. 그러나 그라피티 아트가 가진 문자추상의 가능성을 반추해 본다면, 우리는 힙합 마니아들이 쏟아내는 언어들의 새로운 감수성에 주목할 수 있다.

현대미술의 대가 이응노가 시도했던 문자추상에 담긴 추상적 조형성의 문제는 인류 문명의 시원으로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인류사를 관통한 예술적 표현을 끌어내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물론 그라피티가 거리의 한량들이 펼치는 사회적 일탈로 평가받는 데는 공공장소나 기물에다 몰래 그림을 그리고서 도망치는 보밍(bombing) 등으로 인해 불법 이미지를 씌운 탓이 크다. 비평문화가 생기고 담론을 만들고 그것이 다시 창작의 세계로 연동하는 그라피티 아트의 선순환 구조를 만든다면 우리는 훨씬 더 풍부한 문화생태계를 통하여 새로운 소통언어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라피티 아트 당사자들이 이 대목에 좀 더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사회예술 차원의 아카이빙과 비평적 접근, 그리고 시민사회의 관용문화가 더해져야 할 일이다. 그라피티 아트는 바야흐로 소수자문화의 특이성으로부터 동시대 문화 전반의 보편적 소통 기제로 전환하는 길목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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