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이후 올림픽 첫 메달, 김성집 고문 별세

디지털뉴스팀

한국에 광복 이후 올림픽 첫 메달을 안긴 김성집 대한체육회 고문이 20일 오후 별세했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향년 97세.

고인은 지난 1월21일 중앙대병원에 입원했다가 한달여 만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빈소는 아산병원이다.

김성집 고문은 한국이 태극기를 들고 처음 참가한 1948년 런던 올림픽 남자역도 미들급에서 동메달을 따내며 한국 올림픽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는 전쟁 중이던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올림픽 역사상 첫 연속 대회 메달리스트였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역도 대표로 출전한 김성집이 사상 첫 올림픽 메달(동메달)을 들어올렸다. | 대한체육회 제공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역도 대표로 출전한 김성집이 사상 첫 올림픽 메달(동메달)을 들어올렸다. | 대한체육회 제공

김 고문의 일생은 치열했던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19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 고문은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며 체육인의 삶을 시작했다.

한국에 역도를 보급한 서상천 선생과의 만남이 운명을 바꿨다. 김성집 고문은 서상천 선생의 ‘현대 체력증진법’을 읽고 역도를 동경했고, 서 선생이 운영하던 중앙체육연구소에 발을 들였다.

역도 입문 2년 만인, 1935년 제6회 전조선 역기대회 중체급에서 정상에 오르며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조선 예선에 나서 합계 317.5㎏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조선 대표로 전일본 역기선수권대회에 나선 김성집 고문은 다시 317.5㎏을 들어 챔피언이 됐다. 그러나 일본역도연맹은 “김성집이 만 18세가 되지 않았다”며 올림픽 출전을 불허했다.

1945년 8월15일, 조선이 일제 치하를 벗어나면서 이런 설움은 사라졌다. 휘문중학교에서 역도부 후배를 가르치던 김성집 고문은 다시 훈련을 시작했고 올림픽 출전을 꿈꿨다. 김 고문은 1948년 런던 올림픽 역도 대표팀 선발전에서 미들급 합계 385㎏으로 우승했고 마침내 올림픽행 티켓을 손에 넣었다.

미들급에 나선 김 고문은 합계 380㎏을 기록했고,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선수가 따낸 올림픽 첫 메달이었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터졌다. 부산으로 내려간 김 고문은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훈련을 이어갔다. 전쟁 중에도 한국은 헬싱키 대회에 나섰고, 김 고문은 감독 겸 선수로 75㎏급 경기에 나섰다.

김 고문은 합계 382.5㎏으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올림픽 역사상 첫 연속 대회 메달리스트가 탄생했다.

대한체육회 김성집 고문 | 연합뉴스

대한체육회 김성집 고문 | 연합뉴스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5위를 기록한 김 고문은 이후 행정가로 한국 스포츠에 기여했다. 1960년 대한체육회 이사가 된 그는 이후 체육회 사무총장, 태릉선수촌장, 체육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스포츠 행정의 기초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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