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방’서 혼자 번역하던 이들이 뭉쳤다… ‘번역 공동체’ 활기

한윤정 기자

‘펍헙번역그룹’ ‘북트랜스’ 등 공동작업 모임·회사 늘어

정보 공유·공부하며 번역 질 높이고 기획부터 출간까지 일관작업도

번역은 원래 혼자 하는 일이었다. 고독하게 텍스트와 씨름하면서 언어와 언어 사이에서 가장 적절한 균형을 갖춘 다리를 찾아내는 일이 번역이다. 그러나 요즘 번역가들은 회사나 모임의 형식으로 서로 만난다. 번역이 언어와의 고투가 아니라 문화를 교류하는 일이 되기 위해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공부하면서 기획부터 출간까지 일관작업에 참여한다.

■ 전공과 관심분야 달라 상호보완의 동지관계 유지

‘펍헙번역그룹’은 대표적인 번역 공동체다. 이곳은 번역가 강주헌씨에게 번역수업을 들었던 수강생들로 구성돼 있다. 강씨는 한겨레문화센터에서 번역수업을 하면서 예비 번역가들에게 실제 작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터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의욕적인 수료생들과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출판사에서 번역을 의뢰할 때 몇몇 알려진 번역가에게 일이 몰리다보니 신인들의 진입이 어려운 편이지요. 그래서 일을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젊은 번역가들이 번역에만 만족하지 않고 책과 출판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펍헙번역그룹’ 회원들이 10일 한자리에 모였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윤혜,고은주,김민수,서정아,배은경,김수민,강순이,김나현,정한결,고기탁,정미현,노승영,하윤숙,강주헌,김보은,배충효씨.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펍헙번역그룹’ 회원들이 10일 한자리에 모였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윤혜,고은주,김민수,서정아,배은경,김수민,강순이,김나현,정한결,고기탁,정미현,노승영,하윤숙,강주헌,김보은,배충효씨. |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강씨가 운영하는 서울 동교동 펍헙에이전시가 이들의 아지트가 됐다. 한 달에 한 번 정기모임, 일주일마다 약식모임을 갖는 게 7년여 계속되면서 회원은 30여명으로 늘었고 이 중 10여명은 전업 번역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 <진화의 종말> 등을 번역한 하윤숙씨, <통증연대기> <자연 모방> 등의 번역자인 노승영씨, <일생에 한 번 내게 물어야 할 것들> <모든 슬픔에는 끝이 있다> 등의 정미현씨를 비롯해 고기탁, 한상연, 최은정, 이재경, 최유나씨 등이 이곳 소속이다.

이들은 펍헙에이전시로 들어오는 해외 출판사의 홍보물을 검토해 한국 시장에 내놓을 만한 책을 고르고 발췌 번역한 뒤 검토의견서를 써서 ‘위클리’ 형식으로 국내 출판사들에 보낸다. 그리고 책에 관심을 갖는 출판사가 있으면 출간계약을 거쳐 번역까지 맡는다. 번역서 출간의 전 과정에 참여하는 셈이다.

또 관심분야에 따라 공부모임을 꾸려 함께 책을 검토하고 분담해 번역한다. 이런 공동작업으로 나온 책이 <세계 최고의 학습법> <강철의지> 등이다. 공부 차원에서 초벌 번역만 해놓은 책들도 여러 권 있다. 번역에 입문하고 싶은 후배들을 위해 ‘펍헙번역학교’란 블로그도 운영한다. 예문을 제시한 뒤 나중에 모범답안을 제시한다. 번역가 정미현씨는 “서로 전공과 관심분야가 달라서 많은 도움이 된다”며 “각자 자신의 재능을 나누면서 동지관계를 유지한다”고 말했다.

‘북트랜스’는 새로운 형태의 번역회사다. 출판사 편집자 출신인 추지영씨가 꾸린 이곳은 번역자와 윤문자, 교정자가 함께 참여하는 형태로 운영된다. 보통 번역만 해서 출판사에 넘기면 편집자들이 오류를 바로잡고 윤문을 한 뒤 교정자가 맞춤법에 따라 문장을 수정하는데 이 절차를 모두 마쳐 완전 원고 상태로 출판사에 넘기는 것이다.

“번역자마다 차이는 있지만 번역문장 그대로 책을 내기는 어렵지요. 편집자가 윤문을 하다보면 그 과정에서 오류가 생기기도 하고요. 요즘 독자들의 수준이 높아서 오류가 많은 번역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저희는 상호 검토를 통해 오류를 최대한 줄이면서 정확하고 아름다운 번역을 하려는 것입니다.”

이곳은 지난해부터 북로드출판사에서 나오는 세계문학콜렉션을 맡아 <위대한 개츠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폭풍의 언덕> 등 5권을 출간했다. 번역자 한 사람의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옮긴이 이름도 개인이 아닌 ‘북트랜스’로 나간다. 현재 영어를 주로 하는 추씨 이외에 독일에 거주하는 우호순씨, 일어 전문인 이선라씨 등 5명이 소속돼 있고 작업에 따라 외부 인원이 결합한다. 추씨는 “세계문학은 심오하고 까다로운 작업이었지만 번역가 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보다 완성도가 높았다고 생각한다”면서 “앞으로는 경제경영서 쪽으로 활동영역을 넓히겠다”고 밝혔다.

이들 외에 출판 편집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번역그룹은 ‘사이에’ ‘창’ ‘바른 번역’ ‘인트랜스’ ‘엔터스 코리아’ 등이 있다.

번역가 임희근씨가 2003년에 만든 ‘사이에’에서는 영어·프랑스어 서적을 주로 번역하는 번역가 10여명이 활동 중이다. <파리의 모더니티> <사랑과 죽음의 교향곡>을 옮긴 김병화씨, <중력과 은총>을 옮긴 윤진씨, <한 여자>를 옮긴 정혜용씨,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를 옮긴 김희진씨 등이 소속돼 있다. 이들은 한 달에 한두 번 기획회의를 통해 번역서를 고르고 서로 까다로운 문장을 상의한다. 번역가들이 출판사와 계약을 할 때 참조할 표준계약서도 만들었다. 임희근씨는 “주위에서 ‘따로 또 같이’ 일하는 네트워크를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조언을 듣고 ‘사이에’를 만들었다”며 “우리가 책을 찾아 소개하고 능동적으로 번역 조건을 제시하고 인세도 제대로 받는 번역공동체를 지향한다”고 말했다.

■ 활동무대 넓어졌으나 노력에 걸맞은 대우는 못 받아

‘창’은 고려대 한문학과 출신 번역가들의 공동체로 동아시아 역사·문화·고전을 주로 소개한다. 대표인 번역가 양휘웅씨는 출판사에 대학 선후배를 번역가로 추천하다가 아예 2008년 회사를 만들고 의뢰받은 원서를 번역할지 결정하는 회의를 열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온 책이 최근 출간된 <만주족의 역사>를 비롯해 십수권에 달한다. 이곳 소속인 김성배, 최고호씨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번역가로 일하는 투잡족으로 <자금성의 황혼> <CEO를 위한 중국사 강의> 등을 옮겼다.

‘창’은 지난해 새로운 도전을 했다. 기획, 번역을 위주로 하다가 제안한 기획이 출판물로 나오기까지 수년씩 걸리자 아예 모노그래프라는 출판사를 만든 것이다. 올해 말 <몽골족의 역사>를 시작으로 일부 기획 번역서들이 이 출판사를 통해 출간될 예정이다. 양휘웅씨는 “모노그래프를 통해 출간할 책을 10권 이상 기획했다”며 “한 해 3~4권의 양서를 꾸준히 내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최근 출판시장이 해외서적 위주로 재편되면서 번역가들의 활동무대가 넓어졌으나 시장 불황 등으로 아직까지 노력에 걸맞은 대우는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작품이나 출판사마다 차이가 있지만 영어 번역은 원고지 1장에 3500원, 그 밖의 외국어는 1장에 4000~4500원 수준이다. 공동작업을 하더라도 원고료는 올라가지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감을 받는 조건으로 회사에 일정한 수수료를 내기도 해서 번역가 개인에게 돌아오는 돈은 더욱 적어진다.

정미현씨는 “번역은 정년이 없고 만족도도 매우 높은 일이지만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들은 경제적 고민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추지영씨는 “공동작업을 유지하려면 기획단계부터 참여할 수 있고 작업조건이 좋은 출판사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강주헌씨는 “번역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20대 대학 졸업생부터 은퇴 이후의 직업으로 생각하는 50대까지 다양하다”면서 “그러나 번역가층이 늘어나면서 오히려 대우가 나빠지지 않는지 우려되기도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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