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벌레 치료

노승영 번역가

가끔 노래의 한 대목이 귓전에 쟁쟁거리며 떠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대목을 귀벌레(earworm)라고 하고 귀벌레를 넣어둔 노래를 (한국식 영어로) 후크송이라고 하더군요. 번역하다 보면 노래 아닌 귀벌레가 맴돌기도 하는데, 지금 저의 귀벌레는 ‘대(對)’라는 낱말입니다. 너무 지긋지긋해서 귀를 뽑아버리고 싶습니다. 아니면 귀벌레를 세상에 퍼뜨리든지요. 그러면 누군가 치료제를 개발해줄지도 모르니까요. 방법이 없을까요, 선생님?

노승영 번역가

노승영 번역가

그나저나 3시즌 연속 10연패의 대기록을 작성한 한화, 올해는 기대해도 괜찮은 걸까? “한화는 22일 스프링캠프지인 미국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 솔트리버필드 앳 토킹스틱에서 열린 네덜란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팀과의 연습경기를 15-4로 이겼다.”(경향신문 2월23일 보도)

한화 팬들에겐 미안하지만 “15-4”라는 문구를 보고서 내게 떠오른 생각은 ‘자네들 올해도 글렀군’이었다. 상대팀이 15점이고 홈팀 한화가 4점이니 한화의 패배 아니겠는가. 아니라고? 내가 점수를 잘못 봤다고?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내가 입술이 터지고 눈에 시퍼렇게 멍이 든 채 친구들을 만나 떠벌린다. 어젯밤 으슥한 뒷골목을 걷다가 동네 건달들과 시비가 붙어서 1 대 3으로 싸우다 이렇게 된 거라고 으스대며 말한다. 친구들은 “우와!” 하고 반응했을까? 아니다. “에계~”라고 핀잔했다.

나는 “3 대 1”이라고 말해야 했다. 영화 <비트>에서 환규(임창정)가 민(정우성)에게 던지는 명대사 “작년에 17 대 1로 다구리 붙다가 허리를 좀 삐끗했지”를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나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대’가 ‘~에 대하여’를 뜻하는 접미사임을 알 수 있다. 즉, 앞 숫자는 네 것, 뒤 숫자는 내 것이다.

이제 “15-4”에서 내가 한화의 불운을 예감한 까닭이 납득될 것이다. 그런데 승패를 헷갈리는 것은 약과다. 정말 심각한 것은 ‘비율을 읽는 법’이다. 물과 소금을 10 대 1의 비율로 섞으라고 하면 누구나 물 10, 소금 1이라고 알아들을 것이다. 그런데 물‘에’ 소금‘을’ 섞을 때는 10 대 1의 비율로 섞어야 할까, 1 대 10의 비율로 섞어야 할까? 정신 바짝 차리기 바란다. 배추를 절이려다 바짝바짝 말려버릴지도 모르니까. 이런 난감한 상황은 “A:B”라는 표현을 “A 대 B”로 표기하도록 한 규칙 때문이다. 수학에서 “A:B”는 “A/B”, 즉 “B에 대한 A의 양”을 뜻한다. 즉, A는 나의 것(나뉘는 수), B는 상대방의 것(나누는 수)이다. 영어에서는 “A:B”를 “A to B”로 읽는다. 이것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A에 대한 B”가 아니라 “B에 대한 A”가 된다!

정리해보자. 이 모든 혼란의 근원은 ‘대’가 접두사처럼 쓰일 수도 있고 접미사처럼 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대’가 접미사라면 ‘대북 전단’의 ‘대’는 접두사다. 나는 지금 당신들이 한국어를 대충 써온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선생님은 귀벌레에 감염되셨습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스스로 치료제를 개발하셔야 합니다. 방법은 다음 문제를 푸시는 겁니다. ‘일당백’은 ‘한 명당 백 명’일까요, ‘백 명당 한 명’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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