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인사

노승영 번역가

요즘 ‘받은편지함’을 열기가 두렵다. 집필 계약을 맺고 번역서 작업도 함께한 편집자가 올 2월 e메일로 퇴사를 알려왔고, 최근작을 담당한 편집자도 며칠 전 퇴사 e메일을 보냈기 때문이다. 편집자의 퇴사 인사는 늘 갑작스러워서 나는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채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질긴 줄 알았던 끈이 툭 끊어져버린 느낌이랄까. 편집자와 번역자는 기본적으로 갑과 을의 관계다. 편집자와 번역자 사이에 정이 싹틀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미운 정’일 것이다. 편집자는 나를 지금 고생시키는 장본인이요, 나의 잘못을 캐내려고 눈에 불을 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편집자가 보낸 교정지에는 나의 모든 치부를 까발리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잔뜩 배어 있다.

노승영 번역가

노승영 번역가

하지만 작업 중인 책에 대한 애정을 공유하는 사이라면 공동 운명체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 편집자는 외로운 번역자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편집자가 무심하게 칭찬이라도 한마디 건넨다면 그 효과는 ‘야옹(夜翁·작업실에서 기르는 고양이 두 마리 중 새침한 쪽)’이 한 번도 해주지 않던 꾹꾹이를 정성스럽게 해주는 것에 비길 수 있지 않을까.

퇴사 인사에 “오늘부로 OO출판사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면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더 좋은 조건을 찾아 자리를 옮겼거나 스카우트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 공부를 더 하겠다거나 잠시 쉬면서 재충전하겠다거나 아예 아무 언급도 없으면 문진을 올려놓은 것처럼 가슴이 무거워진다. 20일자 신문에서 편집자를 비롯한 출판노동자들이 “노동환경 개선과 최소한의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에도 비슷하게 가슴이 무거워졌다.

지난 3월30일자 겨를 코너의 칼럼 ‘시간을 팔고 싶은 사람들’에서 나는 프리랜서가 정규직 노동자를 부러워한다고 썼지만, 16년간 번역에 종사하면서 편집자를 부러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책 마감이 닥쳐오면 한 주에 52시간을 훌쩍 넘겨 일한”다는 건 노동력의 대가뿐 아니라 노동의 대가조차 제대로 받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니까. 번역자는 책 표지에 이름이 실리고 번역 저작권을 인정받고 작가 대접을 받지만, 편집자에게 남는 것은 책 맨 뒤 판권지에 이름이 작게 실리는 것을 제외하면 가냘픈 ‘보람’이 전부일 것이다. 게다가 퇴사한 뒤에는 그 책과 아예 무관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받은편지함’의 검색란에 ‘퇴사’라고 입력하니 그동안 받은 퇴사 e메일이 13통이다. 내게 고별인사를 보낸 편집자만 13명이니, 기별 없이 떠난 사람까지 하면 수십명은 될 것이다. 지금껏 번역한 100종의 담당 편집자 100명 중에서 출판사에 남아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렇다고 이별을 아쉬워만 할 수는 없다. 책을 읽다가 뒤늦게 오타를 발견하면 재쇄에 반영해달라고 요청해야 하고 인세 계약을 했으면 그때그때 정산을 요구해야 한다. 아마도 며칠 지나지 않아 업무를 인계받은 신임 편집자에게서 e메일이 도착할 것이다. “안녕하세요. OOO 편집자의 후임으로 들어온 OOO입니다….” 나는 새로운 관계를 맺을 것이고 미운 정을 쌓아갈 것이다. 이번에는 오래오래 함께할 수 있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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