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막 술래잡기

노승영 번역가

오후 7시40분 롯데백화점 앞에서 세 명이 만났다. 은정씨는 차와 사다리를 가져왔고, 준범씨는 큰 키와 머릿속 지도를 가져왔다. 나는 눈과 귀와 팔다리를 가져왔다. 보고 듣고 일하고 기록하기 위해서. 이날 저녁 우리가 할 일은 고양녹색당이 설치한 현수막을 수거하는 것이다. 구청에서 먼저 철거하기 전에.

노승영 번역가

노승영 번역가

사건의 발단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산황동에 있는 9홀짜리 골프장을 18홀로 증설한다는 계획이 발표됐는데, 녹지를 훼손하고 인근 농경지에 피해를 입히는 것은 물론 불과 300m 옆에 있는 정수장을 맹독성 농약으로 오염시킬 우려가 있어 주민과 환경단체 등이 지금껏 반대 운동을 벌여왔다. 2018년 ‘조건부 동의’로 환경영향평가가 승인됐는데, 올해 7월이면 5년의 유효 기간이 끝나 골프장 측에서 환경영향평가를 다시 받아야 한다. 그러면 사업을 계속 추진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6월 한 달간 온 힘을 다해 골프장 사업 승인을 막아야 했다.

쓰레기를 만들지 않기 위해 지난해 지방선거 때에도 현수막을 걸지 않았던 고양녹색당이 이번에 열 장이나 걸기로 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 대신 직접 수거해 재활용하기로 했다. 우리가 간과한 것은 고양시 공무원들의 근면 성실함이었다. 게시 기간을 사나흘 넘겼을 뿐인데, 현수막이 온데간데없어졌다. 범시민대책위 결정에 따라 현수막 열 장을 추가 제작해 걸면서 이번에는 반드시 수거하겠노라 다짐했다.

게시 종료일이자 수거 예정일인 7월4일 폭우가 쏟아져 거사를 하루 미루기로 했다. ‘고작 하루 늦었는데 별일 있겠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두1동 사거리로 향했다. 휑했다. 서둘러 백마 2·3단지 사거리로 이동했다. 말끔했다. 두 군데만 더 돌아보자고, 그곳도 철거됐으면 그냥 철수하자고 말했다. 사위가 어둑해질 무렵 대곡역을 지나다 드디어 첫 현수막을 발견했다. 부지런한 구청 직원들이 아직 여기는 들르지 않았나보다. 술래잡기하듯 시내를 누비며 현수막 열 장 중 다섯 장을 수거하고 나니 10시가 훌쩍 넘었다.

절반의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마음이 홀가분했던 것은 골프장 반대 운동이 승리했기 때문이다. 고양시장이 실시계획인가 미승인 결정을 내린 것이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현수막을 걷으러 다닌 것이 전부였지만 개선장군처럼 으쓱했다.

지난해 ‘옥외광고물법’이 개정되면서 정당 현수막을 무제한으로 걸 수 있게 됐다. 소수 정당 입장에서 정치적 의사 표현과 홍보의 길이 열린 것은 환영하지만, 시민 입장에선 길을 걸을 때마다 사거리에 빼곡히 들어찬 현수막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구청 직원들이 열심히 철거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다 문득 등골이 서늘하여 거대 양당 중 한 곳의 현수막을 유심히 들여다봤더니 게시 기간이 일주일이나 지나 있었다. 또 다른 거대 정당의 현수막도 마찬가지였다. 어라, 부지런한 공무원들 아니었어?

하필 게시 기간이 지난 단 두 장의 현수막이 내 눈에 들어온 걸까? 현수막이 철거되는 족족 새로 제작해 걸 수 있는 자금과 의지를 가진 정당들이니, 제작 횟수라도 줄여 쓰레기를 덜 만드는 게 나으려나? 그나저나 우리가 걸었던 것을 포함해 저 현수막들은 철거 전부터 이미 쓰레기였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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