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의 초능력

노승영 번역가

경향신문 9월2일자 ‘시선’ 코너에 ‘사실 우리는 초능력자다’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잎을 우수수 떨구며 죽어버린 식물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소원을 보면서 내가 한때 가졌던 초능력이 떠올랐다. 이걸 독심술이라고 불러야 할지 투시술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상대방이 아무리 격식을 갖춰 정중하게 글을 쓰더라도 그의 속내를 꿰뚫어볼 수 있었다. 중립적이고 무미건조한 어휘 속에서 엉겁결에 불거져 나오는 프로이트적 말실수를 포착하거나 격조사 자리에 보조사를 쓰는 등의 사소한 차이를 통해 숨은 의도를 간파했다.

노승영 번역가

노승영 번역가

이를테면 편집자가 장문의 메일에서 나의 번역을 칭찬하더라도 나는 그가 ‘이번에도’가 아니라 ‘이번에는’이라고 쓴 것을 놓치지 않고 실은 그가 나의 이전 번역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캐낼 수 있었다. 이 능력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십수년에 걸친 수련의 결과다. 번역가가 시간당 처리하는 활자의 양은 모든 직업군을 통틀어 가장 많은 축에 들 것이다. 처음에는 낱말의 사전적 의미만 파악하면 문장의 의미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묘한 어순 변화, 수동태, 이탤릭체, 반점·쌍점·쌍반점의 효과, 수사의문문, 말줄임표 등 온갖 장치에서 의도와 감정과 욕망을 읽어낼 수 있게 된다. 이런 장치를 간파하지 못한 채 글을 읽는 것은 표정과 몸짓과 음색과 고저장단이 없는 말을 듣는 꼴이다. 이런 문장은 모래로 쌓은 성과 같아서 다음 문장을 읽을 때면 이미 허물어져 있다. 뇌리에조차 뿌리 내리지 못하니 이런 문장이 나를 감동시키고 행동을 바꾸고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문자를 다루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언어의 미묘한 차이에 예민해져 급기야 저자가 의도적으로 구사한 장치뿐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내비친 단서까지 포착하기에 이르게 된다. 문제는 현미경의 배율이 높아질수록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티끌인지 표본인지 헷갈린다는 것이다. 잡음 대 신호비가 점점 커져 신호가 잡음에 묻히고 만다(용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난 3월2일자 ‘귀벌레 치료’를 참고하기 바란다). 2019년 하반기부터 2021년 상반기까지 ‘OOO 빅픽처론’에 솔깃했던 것도 잡음을 신호로 착각했기 때문 아닐까. 이제 생각해보니 내가 초능력이라고 생각한 것은 차라리 질병에 가까웠다. 애초에 내가 활자의 단서에 예민해진 것 자체가 음성적 단서를 포착하지 못하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뇌의 보상 활동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말을 들여다보는 현미경은 배율이 너무 낮고 글을 들여다보는 현미경은 배율이 너무 높은데, 어느 쪽이든 정상적 소통이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오늘 아침에도 신문을 읽고 있지만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신이 하는 말에 망설임이나 거리낌이 있다면 티가 나게 마련인데 다들 진리를 선포하기라도 하듯 당당하다. 느닷없이 언성을 높이고 말꼬리를 돌리고 적반하장으로 트집을 잡는 것은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다는 거의 확실한 증거인데 그런 말이 버젓한 발화와 대등하게 취급되고 있다. 안테나를 세워 행간을 읽으려 해도 안개 속처럼 뿌옇기만 하다. 어쩌면 내가 포착하려는 신호는 처음부터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저 문장들은 건축물이 아니라 모래성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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