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영 번역가

28일 전 출간된 윤고은의 소설 <불타는 작품>, 21일 전 개봉한 재즈 애니메이션 <블루 자이언트>, 1000년 전 간행된 갈레노스의 의서 <의학적 경험에 대하여>에는 공통점이 있다.

<불타는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미국 팜스프링스에 있는 허구의 로버트재단 미술관이다. 주인공인 미술가 안이지는 대부분의 대화를 영어로 주고받는다. 띠지에 따르면 이 작품은 국내 출간 전 영미권 수출 계약이 체결되었다고 한다. 한편 <블루 자이언트>의 원작은 같은 제목의 단행본 만화다. 애니메이션은 재즈 피아니스트 우에하라 히로미가 음악감독을 맡아 ‘퍼스트 노트’ ‘위 윌’ 등의 삽입곡을 작곡했다. <의학적 경험에 대하여>는 2세기에 갈레노스가 집필한 그리스어 원본이 소실되어 아랍어로만 전해진다.

지금쯤 여러분은 세 작품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짐작을 했을 텐데, 그것은 원본이 사라진, 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번역본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로버트가 보낸 편지 속 “쓸쓸한 벽난로의 오렌지빛 불이 춤추듯 타오르는 그 저녁에”라는 문장은 본디 영어로 쓰인 것이 틀림없지만 그 원문이 무엇이었는지는 저자 윤고은조차 모를 것이다(사실은 영어도 아닌 것이, 로버트는 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영어로 번역하고 있을 한영 번역자는 존재하지 않는 원본을 복원하고 있는 셈이다.

작중 사와베 유키노리가 작곡한 ‘퍼스트 노트’의 원곡은 우에하라 히로미가 작곡한 곡과 다르다. 만화 <블루 자이언트> 제6권 59쪽을 보니 원곡은 G키에 4분의 13박인 데 반해 애니메이션 삽입곡은 A키에 8분의 7박이다. 번역으로 치자면 명백한 오역이다. 하지만 오역을 저지른 번역자는 만화 저자 이시즈카 신이치일까, 애니메이션 음악감독 우에하라 히로미일까?

갈레노스는 129년경 아나톨리아에서 태어난 그리스 의사로, 4체액설 등을 주장하여 서양 의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랍의 의사 후나인 이븐 이스하크가 갈레노스의 책을 아랍어로 번역하여 후대에 전했는데, 상당수 책들은 이 아랍어 번역본으로만 남아 있다.

<불타는 작품>의 원본은 아예 존재하지 않고 ‘퍼스트 노트’의 원본은 이시즈카의 머릿속에만 들어 있었을 것이고 <의학적 경험에 대하여>의 원본은 분명히 존재했으되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다.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저자의 머릿속에만 들어 있는 원본을 번역하는 일을 과연 번역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렇게 바꿔 물을 수도 있겠다. 우리가 창작이라고 알고 있는 행위의 상당수, 어쩌면 전부가 실은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 번역에 불과한 것 아닐까?

내 번역서의 원서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얼마나 행복할지 상상해본다. 그러면 나는 작가에게 종속되는 존재가 아니라 작품에 대한 권위를 온전히 누리는 ‘저자’가 될 것이다. 파영(波英) 번역가 제니퍼 크로프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을 읽을 때, 책에 있는 모든 낱말은 내 것이다.”

번역은 복원이다. 존재하지 않는 원본을 복원하는 일은 창작이다. 창작은 번역이다.

노승영 번역가

노승영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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